원없이 다 해보고....
link  호호아줌마   2025-01-06
원없이 다 해보고

원 없이 다 해보고 보낸다는 말은 아무래도 자식을 앞세우는 상황에 몰린 부모들에게서 많이 나온다. 몇달째 원인 모를 열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고등학생 오혁수 씨가 외래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부모는 안절부절못했다. 기본 진찰과 검사만으로도 자가면역 질환이라는 것이 확실했고, 환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바로 입원을 결정했다.

혁수 씨는 교과서에 나오는 자가면역 질환의 전형적인 증상을 다 가지고 있었다. 적혈구가 쉼없이 깨지고 있어서 혈색소 수치가 정상 수치의 반밖에 안되었다. 소변으로 단백질이 물 새듯 새어나왔고, 콩팥기능이 떨어지면 몸은 풍선처럼 부었다. 조직검사를 하기 전에 먼저 스테로이드 충격요법과 화학요법을 실시해 콩팥기능을 안정시켰다.

강력한 치료 후 열도 잡히는 듯하고 전신 상태도 조금 좋아졌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쉰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환자는 헛소리를 하며 병실을 지키는 엄마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경우 순전히 의사의 직관으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병세가 악화돼서인지, 약물부작용인지, 아니면 감염증과 같은 전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것인지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따져보아야 한다. 병세가 악화되었기때문이라고 판단하면 약물치료를 증량해야 하고 약물부작용이라면 약을 줄여야 하는 정반대의 길림길에 서게 된다.

나는 우선 약물부작용으로 판단하고 스테로이드를 줄였다. 다행히 증상이 좋아져서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며칠 후 이번에는 배가 아프다며 밥을 못 넘기고 침상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췌장염까지 생겼을까 하며 초음파 검사를 해나르던 맛있는 반찬들을 다 금지시켰다. 혁수 씨는 코에, 말이 치료지 고문에 가까운 레빈튜브를 꽂고 금식에 들어갔다. 다행히 일주일쯤 지나 이번 위기도 잘 해결되는 듯 보였고, 2차 면역치료를 시작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다시 열이 치솟았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열이 나는 모양새나 환자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단순히 면역 질환의 증상 같아 보이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열이 나던 날 채취한 혈액에서 균이 자라고 있었다. 다시 항생제 주사하면서 이번에는 균이 자라는 장기가 어디인지를 찾아야 했다. 폐도 아니고 신장도 아니었다. 환자는 몹시 힘들어했다. 그런데 심전도 리듬이 입원 당시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심장에 청진기를 대어보았다. 희미하게 잡음이 들렸다. 입원 당시에도 있었던 걸 내가 놓쳤는지, 이번에 새로 생긴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설마설마하면서 심장 초음파를 대본 나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심장판막에 염증이 있었고 여기서 균이 자라 온몸으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이렇게 면역 저하 환자에게서 발생하는 감염성 심내막염은 치사율이 매우 높다.

한달 가까이 되는 입원 기간 동안 가지가지 위기 상황을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질병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환자와,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의료진, 그를 지켜보며 노심초사하는 가족을 비웃고 있었다. 균이 자리를 잡은 모습도 매우 사나웠다. 판막을 가차없이 갉아먹는 양상이었고, 여차하면 판막이 찢어져 급사할 수도 있었다. 심장판막 수술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흉부외과 교수를 찾아가서 환자 상태를 설명하고 수술 준비를 하던 중에 환자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내 앞에 넙죽 엎드리더니 말했다. “교수님, 우리 혁수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하게 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한번도 큰 병원 운운하지 않고 의료진과 호흡을 맞춰온 분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생사를 넘나드는 큰 수술을 해야하는 상황이 닥치니,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젊은 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더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아버님, 일어나세요. 이러지 마세요. 제가 아버님 뜻을 잘 알았으니 바라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어날 생각은 않고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제가 교수님께서 그동안 애써주신 거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니 제발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 혁수는 제가 집을 팔아서라도 꼭 살려야 합니다. 그러니 원이라도 없게 수술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받게 해주십시오.“ 전화 한통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환자의 치료를 책임질 수 없는 현실이 못내 서운했지만, 그건 내 능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흉부외과 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전원을 준비했다. 섭섭한 마음도 잠시, 위중한 상태에서 전원을 하는 혁수씨가 무사히 수술을 잘 견디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혁수씨의 심장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그후의 경과도 만만치 않았다. 대퇴근에 농양이 생겨 근육을 뭉텅이로 들어내는 대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환자는 전원 후 2개월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그다음 경과는 알지 못한다. 혁수씨가 어딘가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잘 살고 있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응급 수술 등 내 손을 벗어나는 위험 요인이 생기는 경우, 환자나 보호자나 전원을 요청해오면 나는 두말없이 해주려 하는 편이다. 어차피 위험이 있는 상황이라면 환자나 보호자들은 똑같이 나쁜 결과라도 대형병원에서 그 결과를 맞이했을 때 의심하지 않고 더 쉽게 승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별문제 아닌 병도 무조건 더 큰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도 많다. 내가 병원 근무를 시작했을 때, 환자들이 병원을 선택하는 이유의 90% 이상은 병원 때문이지 개별 의사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적이 있는데 그런 현상이 나아질 조짐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의료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 첨단 기계와 설비에 달린 일이라는 생각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실력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 랭킹이 떨어지는 병원에서 일하거나 개원을 한 의사들은 이래저래 도매금으로 병원수준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의료 전달 체계가 엉망이라는 것은 ‘빅 4’ 병원의 외래 진료실이 경증 환자로 미어터지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어떤 능력을 발휘한 적이 없고 그럴 의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을 배우는 시간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슬기롭게 죽는 법
김현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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